미친만찬 in 모스크바
비극은 생각지 못한 순간에 일어난다
미친여행 in 모스크바의 세 번째 쉬어가는 이야기, 오늘은 열이틀 모스크바 여행에서 겪은 최대의 해프닝입니다. 흔히 여행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라면 처음 공항에 도착해서 낯설은 땅을 헤매며 목적지나 숙소를 찾지 못해 당황했던 경험이나, 현지인들과의 의사소통에서 겪은 어려움 혹은 이역만리 땅에서 길을 잃거나 소매치기 등의 돌발 상황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제 여행의 해프닝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바로 모스크바 최대의 쇼핑몰, 이 유러피안몰에서 말이죠.
때는 여행 일주일차, 이제 모스크바의 모든 것이 익숙해진 듯 자만하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사건 발생 시간은 혼자 했던 저녁 식사 시간
장소는 모스크바 최대의 쇼핑몰
여행의 즐거움에 분명 '음식'이 빠질 수 없고, 누구보다 그 큰 의미를 잘 아는 저 역시 여행 기간 동안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경험해보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지금 떠올려 보면 러시아 전통 음식보다는 한국에서 먹던 것과는 다른 '햄버거', '파스타' 등을 먹는 데 그쳤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의 전통 음식이란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유명한 나라보다 극히 종류가 적고 몇 안되는 음식 역시 현지인들도 쉽게 접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꼬치에 구운 고기 요리인 샤슬릭은 현지에서도 비싼 요리에 속하더군요. 그래서 페르시안 요리나 유럽 요리들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이 날 방문한 이 식당은 유러피안몰 카페에서 만난 현지인의 추천을 받아 찾은 곳이었죠. 유러피안 몰 내부에 있는 '차이호나'라는 식당입니다. 양고기 요리가 맛있고, 이국적인 음식들을 많이 맛 볼 수 있다는 말에 모처럼 나홀로 '외식'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죠.
홈페이지의 규모나 스마트폰 전용 앱을 제공하는 점 등을 보니 이 지역에선 유명한 식당인가 봅니다. 늘 식당을 혼자 방문했던 제가 처음으로 약간의 민망함을 느낄 정도로 식당 내부에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실 이런저런 이유로 저녁 식사는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보거나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서 호텔에서 해결하곤 했는데, 이 날은 이 유러피안 몰에서 모스크비치의 저녁 식사를 해 보고 싶었더랬죠. 결국 이것이 작은 해프닝의 발단이 되었지만.
혹시나 모스크바 여행을 계획중이신 분들께 말씀드리자면 이 식당 음식은 상당히 이국적이고 정확히 국적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서 이색적인 식도락 여행을 꿈꾸신다면 한 번 방문해보셔도 좋겠습니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에 메뉴 소개와 가격까지 나와있으니 미리 참고하시면 더 좋겠죠.
하지만 저는 식사가 끝난 후에 이 값진 정보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간단한 영어가 포함된 메뉴판이 언제 제 앞을 지나쳤는지 모르지만, 저는 이 날도 기본 러시아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한국의 육개장 같아 보이는 수프와 양고기를 주문했습니다. 이 날 이 식당에는 유독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더불어 그 여인들을 에스코트하는 남성들도 많았구요. 역시 어딜 가나 연인들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풍경은 똑같습니다.
주문한 수프가 나왔습니다. 얼큰해 보이는 사진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런대로 그 동안 빵만 먹던 제 속에 잠시나마 한국인의 힘 비슷한 것을 적셔줄 수 있을 것 같은 비쥬얼입니다. 물론 먹어보니 그 기대마저 제 바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요, 수프의 맛은 타이 음식점에서 먹은 똠얌꿍 류의 수프와 비슷한 맛이었습니다. 하지만 안에 고기도 있고 누들도 있어서 오랫만에 반가운 맘으로 식사를 했죠. 가격은 약 400루블로 기억합니다.
여기서 사건의 발단,
Would you like?
네, 사건은 이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나마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건장한 남자 직원이 잇따라 찾아와 '샐러드?' '브레드?'를 연신 물어보며 저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이 곳의 식사에 전채 요리인 샐러드와 사이드 메뉴 빵, 그리고 식후 디저트 등을 함께 주문하는 문화가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혼자서 그렇게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수프와 양고기만 주문했던 것인데요, 주문한 음식 외의 샐러드와 빵을 먹겠냐고 물어보니, 한국의 이웃back 문화에 익숙해진 저는 'ok, 줘, 달라고'라고 흔쾌히 그 청년의 호의에 응답합니다. 마침 검은 머리의 동양계 청년이었던 그에게 따뜻함마저 느끼면서 말이죠.
그렇게 나온 빵, 이렇게 푸짐하다니!
퀘사디아 같은 비쥬얼의 이 빵이 수프보다 훨씬 맛있다
아 이래서 그 친구가 이 식당을 추천했구나
이번 여행은 정말 운이 좋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먼 땅에서 혼자 즐기는 저녁 식사가 이전과는 달리 꽤나 즐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양고기와 샐러드가 나왔습니다.
한국에선 접하기 힘든 양고기는 다소 비싼 가격(695루블)답게 양도 푸짐합니다. 고기의 익힘 정도도 적당하지만 개인적으로 양고기 특유의 냄새 때문에 끝까지 다 먹지는 못했습니다. 샐러드는 오이와 파프리카, 양파, 양상추 등이 든 평범한 기본 샐러드였습니다. '그래 코스에 있는 샐러드가 다 이렇지 뭐' 라며 평소 먹지 않는 오이를 피해 채소 맛을 봅니다.
이렇게 한 상 차려놓고 보니 정말 푸짐합니다. 혼자 앉아서 먹는 것이 민망하기도 하면서, 이 먼 곳에서 이렇게나 푸짐하게 잘 먹고 있다는 것이 뿌듯하기까지 합니다.
사진을 찍어 '엄마 나 여기서 이렇게 잘 지내'라고 자랑하고 싶더군요. 이미 퇴각한 수프를 포함해 샐러드와 빵, 양고기까지 어디 내놓아도 부럽지 않은 푸짐한 한 상을 즐겼습니다. 이 저녁 식사는 잊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평소 엄청난 대식가로 유명한 저지만, 도저히 이 음식들을 다 먹을 순 없어서 결국 남겨버렸습니다. 멀리서 온 까레이스키에서 베풀어준 호의가 감사하긴 하지만 배가 너무 불렀거든요, 친절히 웃으면서 저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그랬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건장한 직원에게 계산서를 부탁합니다.
그래서 오늘 만찬의 식대는
왜 이 로고가 떠올랐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계산서의 내역을 훑어보며 다행히 표정관리는 잘 했습니다만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흔들리는 동공은 손으로 붙잡을 수도, 깜빡여 멈출 수도 없습니다. 제가 주문한 양고기와 수프, 그리고 콜라 외에 샐러드와 빵, 그리고 뭔지 모를 내역들이 덕지덕지 붙어 총액은 자그마치 1985 루블이었습니다. 저렴했던 당시 환율로도 약 4만원에 육박하는 엄청난 금액.
아
아...
아.....
네, 그 건장한 친구의 호의는 알고보니 추가 주문이었던 것.
결국 팁을 포함해 2200루블을 지불하고 식당을 나왔습니다. 아니 그 전에 테이블을 한 번 더 보고 남은 음식들을 먹었습니다. 절대 먹지 않는 오이도 이 날은 남김 없이 다 먹었습니다.
그렇게 끝난 모스크바 여행 최고의 만찬, 물론 마지막까지 아무렇지 않게 나온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ㅜㅜ)
모스크바에서의 제 최저 하루 생활비를 넘는 엄청난 금액을 들여 즐긴 이 사치스러운 식사는 제 이번 여행에서 저를 가장 당황시켰던 해프닝으로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뭐 소매치기에게 돈을 주는 것 보다는 그래도 제 입에 들어가서 뱃살로나마 쌓이는 게 나았다며 저를 위로해봅니다.
이 정도로 이번 여행의 해프닝을 마무리했으니,
저는 행운아군요(?)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잠재우기 위해 숙소에 돌아가기 전 모스크바의 겨울만큼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해프닝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물론 지나고나면 이런 해프닝이 여행의 추억을 더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나쁜 일 없이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이런 일로 여행이 마무리되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어쨌거나 앞으로 해외 여행에서 식사하실 때 주의합시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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